“패션업계, 챗GPT에 멈췄다” 범용 → 버티컬 AI로 전환, 패션마켓 내 승부는 지금부터

“AI요? 업무할 때 문서 정리하는 용도로만 쓰고 있어요.” “챗GPT나 제미나이 같은 범용 AI는 많이 활용하는데, 패션 특화 버티컬 AI요? 글쎄요.” 패션업계 실무자들의 말이다. 주요 패션기업 대표들은 ‘AI 기반 혁신’을 언급하며 AI 활용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는 것에 비해 실무자들은 아직까지 AI를 본격적으로 활용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 배경에는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생성형 AI는 더 이상 새로운 기술이 아닌 업계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 여기에 국내 패션 산업은 챗GPT · 제미나이 등 범용 AI는 활용하고 있지만 패션 특화 버티컬 AI 도입 속도는 더딘 편으로 나타났다.
앞으로 AI를 선제적으로 도입한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 간 경쟁력 격차가 점차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는 시점이지만, 패션업계에서는 아직까지 버티컬 AI 도입에 대해서는 관망하는 분위기다.
패션 산업은 트렌드, 소재, 시즌성 등 데이터 구조가 복잡하고 문화와 판매 수치 등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한 공급망 구조가 복잡하기 때문에 범용 AI 활용 대신 패션 특화 버티컬 AI를 도입해야만 업무 효율성과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

본지 <패션비즈>가 패션 실무자 216명을 대상으로 2월 27일부터 3월 9일까지 진행한 앙케트 결과에 따르면, 업무에서 AI를 활용하는 수준을 묻는 질문에 ‘업무 전반에 적극 활용 중’이라고 답한 비중이 37.5%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어 ‘일부 업무에 제한적으로 사용 중’이 30.6%, ‘개인적으로 가끔 사용 중’이 16.7%, ‘팀 · 부서 차원에서 활용 중’이 15.3% 순으로 집계됐다.
다만 AI를 가장 많이 활용하는 업무 영역을 묻는 문항에서는 복수응답으로 진행한 가운데 ‘트렌드 리서치 및 자료 분석’과 ‘콘텐츠 제작’이 공동 1위를 기록하며 두 영역을 합쳐 88.8%의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는 패션업계 전반에서 AI 활용이 전체 영역을 아우르기보다는 특정 업무에 집중돼 있음을 보여준다. 해당 업무들은 챗GPT와 제미나이 등 범용 AI를 통해 수행할 수가 있다.

이 같은 분석은 앙케트 결과에서도 확인된다. 패션 실무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AI 플랫폼을 묻는 질문에서는 복수응답으로 진행한 가운데 챗GPT(54.2%)와 제미나이(37.5%)를 각각 1 · 2위로 꼽았다. 두 서비스를 합치면 전체 AI 프로그램 사용 비중의 91% 이상을 차지한다.
이처럼 패션 산업에서 버티컬 AI 활용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한국섬유산업연합회(회장 최병오, 이하 섬산련)는 섬유패션 업계와 AI테크 기업을 연결하는 ‘소통 창구’ 역할을 수행하며 국내 섬유패션 산업의 AI 도입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섬산련 관계자는 “현재 국내 패션 산업에서는 AI 활용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지만, 실제 전사적 도입 단계에 이른 기업은 제한적”이라며 “현시점은 AI 도입의 과도기 단계라고 볼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트렌드 분석이나 디자인 업무는 조직 구조 변화 없이도 범용 AI로 수행이 가능해 업계에서 비교적 빠르게 실험적으로 적용되는 경향이 있다”라며 “반면 생산 공정 자동화나 공급망 최적화와 같은 영역은 데이터 인프라 구축과 조직 프로세스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에 전사적 적용 단계로 넘어가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분야”라고 덧붙였다.

협회는 올해 초 섬유패션 AI 테크기업 간담회를 열고, 패션기업과 AI 테크기업 간 협력 과정에서 겪는 애로사항을 공유하며 상생 발전 방안을 논의했다. 당시 언급된 문제 중 하나는 패션 특화 버티컬 AI 도입에 대해 패션업계 실무자들은 긍정적인 의사를 보였지만, 초기 투자 비용 부담으로 인해 기업의 도입 결정이 지연된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업계의 어려움을 반영해 섬산련은 올해 신규 사업으로 ‘섬유패션-AI 테크기업 간 협업 지원 프로그램’을 추진한다. 패션기업이 버티컬 AI 솔루션 도입을 희망할 경우 해당 솔루션을 제공하는 AI테크 기업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맞춤형 기술 도입 비용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양사 간 협업과 동반 성장을 유도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협회는 AI 지원 프로그램을 추가로 확대해 섬유패션업계의 AX(AI Transformation, 인공지능 전환)를 촉진한다. 우선 기업 맞춤형 시범 사업인 ‘수요예측 서비스’를 추진할 예정이다. 해당 서비스는 범용 대시보드 형태로, 섬유패션 관련 데이터를 수집하고 AI 분석을 기반으로 수요 및 트렌드를 예측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이는 기업 맞춤형 시범 사업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더불어 섬유패션 특화 AI테크 기업 발굴 및 성장 지원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운영해 섬유 - 패션 - AI테크 기업 간 협력 성장 생태계를 마련하고, ‘패션넷(FASHIONNET)’ 플랫폼은 네트워킹의 중심 허브가 될 계획이다. 섬산련의 적극적인 지원과 함께 패션 산업의 디지털 전환을 지원하는 버티컬 AI 솔루션 기업들도 경쟁력이 두드러지고 있다. 생산 공정과 콘텐츠 제작 등 각 영역에서 산업 특화 AI 기술을 통해 패션기업의 업무 효율화를 돕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의류 제조업은 대표적인 노동집약적 산업이자 저부가가치 산업으로 꼽힌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의류 생산 전 과정을 디지털로 전환해 고도화된 생산 구조를 제시하는 기업이 있다. 바로 데이터 기반 AI 솔루션 기업 시제(SIJE, 대표 신인준)다. 이 기업은 SaaS 기반 의류 공급망 솔루션 ‘모노리스(Monolis)’와 빅데이터 기반 IoT 솔루션 ‘모노로그(Monolog)’를 개발 · 운영하고 있다.
신인준 대표는 창업 이전 의류 수출 · 제조 기업 지지무역에서 5년간 공정분석센터 수석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여기에 공정분석센터(PAC) 센터장까지 맡으며 의류 제조 현장에서 다양한 문제를 경험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해 모노리스와 모노로그를 개발했다.
모노리스는 의류 생산 주문 접수부터 완제품 출고까지 전사적 자원 관리를 담당하는 ERP 프로그램과 생산 관리 프로그램 MES를 통합한 공급망 솔루션이다. OEM 업체 각 부서에서 작업지시서, 기술정리서, 자재 리스트 등 다양한 정보를 수작업으로 처리하던 업무를 컴퓨팅 시스템으로 자동화해 효율성을 높였다.
즉, 프로그램에 지시서를 올리면 모든 정보가 자동으로 시스템에 맵핑돼 데이터 파이프라인이 이뤄진다.
모노로그는 빅데이터 기반 IoT 솔루션으로 의류 생산 공정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해 작업자의 생산성에 도움을 준다. 의류 생산 과정에서 모노로그의 효과가 가장 크게 나타나는 구간은 ‘봉제’ 단계다. 봉제 작업은 사고 발생 가능성이 높아 세밀한 관리가 필요한데, 여기에 모노로그를 활용해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다.

모노로그 디바이스가 결합된 봉제 기계를 작업자가 가동하면 바늘 움직임에 따른 진동 데이터와 모터 회전수, 페달 기울기 등을 디바이스가 감지하고 작업자들이 제품 1개를 생산할 때마다 디바이스 버튼을 직접 눌러 생산 데이터를 축적한다. 이는 램프 시스템을 통해 작업자의 생산성을 즉각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축적된 작업자들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실시간 달성률을 확인할 수 있어 관리자가 전체 생산 라인을 개선하는 데도 용이하다. 현장 데이터를 활용해 병목현상을 예측할 수 있으며, AI가 적절한 대응 방식을 제안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생산성은 도입 이전 대비 최소 14% 이상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영원무역, 거림트렌드, 에프앤아이코리아, 굿트러스트 등에서 시제의 솔루션을 도입해 생산성 및 효율성 향상 효과를 경험하고 있다. 이 밖에도 다수의 기업에서 솔루션 도입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신인준 대표는 “벤더 기업의 경우 봉제 공장은 해외에 있고 의사 결정권자는 국내에 있어 중앙으로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라며 “시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현재 새로운 에이전트형 AI ‘tense’의 특허를 준비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업무에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어제와 오늘의 업무 데이터를 기반으로 내일의 업무를 예측할 수 있는 기능을 갖췄다”라며 “또한 작업자들이 대화형 챗봇을 통해 업무를 좀 더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라며 새로운 AI 출시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국내 패션 시장에서 AI 도입이 가장 빠르게 진행되는 분야는 ‘마케팅’이다. 그중 패션 콘텐츠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간과 비용 문제를 줄여주는 특화 AI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 있다. 패션 전문 AI 기업 바이스벌사(대표 김근재)의 패션 콘텐츠 제작 플랫폼 ‘빔스튜디오(VIIMstudio)’다.
빔스튜디오는 패션 영상 생성, AI 화보 제작, 제품 기반 스타일링 콘텐츠 제작 기능 등을 제공한다. 플랫폼은 제품 형태 유지, 원단 질감 표현, 스타일링 맥락 등 패션 도메인에 특화된 학습 구조를 기반으로 설계돼 패션 콘텐츠 영역에서 높은 완성도를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다. 따라서 패션 기업은 별도의 촬영이나 편집 과정 없이도 AI를 활용해 룩북 영상, 브랜드 스토리 영상, 상품 중심 숏폼 콘텐츠 등을 제작할 수 있어 운영 리소스를 절약할 수 있다.
빔스튜디오를 활용한 화보 촬영의 경우 기존 인력 기반 촬영 대비 평균 약 30% 이상 비용 절감이 가능하며, 콘셉트 화보는 로케이션 촬영 비용의 약 10% 수준으로 빔스튜디오를 통해 제작할 수 있다. 영상 콘텐츠도 절반 이상 비용을 줄일 수 있어 패션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빔스튜디오는 카테노이드의 숏폼 커머스 솔루션 ‘찰나(Charlla)’와 올해 상반기 중 서비스 연동을 진행해 AI 영상 시청 후 구매로 이어지는 엔드투엔드(End-to-End) 워크플로우를 구축할 계획이다. 빔스튜디오에서 제작된 AI 숏폼이 찰나 서비스로 바로 송출되면서 영상 콘텐츠와 유통을 연결하는 체계가 완성될 전망이다.

빔스튜디오는 롯데지에프알, 신세계 센텀시티점, MCM 등을 비롯해 빅팍과 줄라이칼럼 등 다수의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특히 서울패션위크 런웨이와 프레젠테이션에서 빔스튜디오의 활용 사례가 주목받고 있다.
지난 2월 열린 2026 F/W 서울패션위크에서 바이스벌사는 ‘홀리넘버세븐’과 ‘에드리엘로스’의 런웨이에 AI 영상 콘텐츠를 선보이며 화제를 모았다.
영상은 단순한 배경이나 오프닝 장치를 넘어 런웨이 시작 전부터 쇼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브랜드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서와 메시지를 관객에게 먼저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AI가 패션쇼에서 ‘보조적 요소’가 아닌 연출의 핵심 요소로 기능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바이스벌사 측은 최근 패션업계에서 버티컬 AI 도입을 검토하는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기업에는 지난해 10월 이후 패션뿐 아니라 다양한 광고 콘텐츠 분야에서 관련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김근재 대표는 “AI가 구현하는 결과가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과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AI가 제안하는 디자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라며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유저들은 더 많은 정보를 학습하고 창의성을 확장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전반적으로 기업들의 AI 도입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은 확산되고 있지만, 빠른 업무 처리가 요구되는 패션업계 특성상 단편적으로 업무 대체 수준으로만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라며 “버티컬 AI 도입 초기에는 시스템을 익히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장기적인 시점에서 인력 운영 효율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